아호/예명



이름이 안좋을 경우 개명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현실상 쉽지가 않습니다.
[개명절차]에 나와 있는 -개명 사유가 될 수 있는 예- 에 들어가지 않는 한 작명학적으로 이름이 좋치 않다고 개명허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아호[雅號](줄여서 호)나 예명[藝名]을 지어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명은 연예인들이 지어 부르는 이름이고 그 외에는 아호를 지으면 됩니다.

물론 이름이 좋더라도 좋은 아호를 가지는 것은 금상첨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소월,박목월,이퇴계,이율곡도 원래 이름이 아닌 아호입니다.
작명학적으로 이름이 나쁘다면 여러분도 아호를 작명이론에 맞추어 짓고,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주위사람들이 혹은 한두명이라도 아호를 불러준다면 그나마 외관상 나쁜이름이든 작명학상으로 나쁜이름이든 보완이 됩니다.
주위사람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이라도 맘속에 아호를 염두해 두고 생활하세요.
아호는 이름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 지향하는 바, 혹은 자신을 자각하게 한다거나, 좋아하는 것등에서 따오게 됩니다.
이름은 돌림자등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하지만 아호는 그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리거나 생각할 때 마다 이름보다도 자신을 더욱 자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외국인들은 닉네임 이라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상에서도 ID난 닉네임을 많이 사용해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인터넷시대에서 본명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아호, 닉네임을 사용하고 알리는 시대가 다시 온것입니다.

이제 저희 작명 시스템으로 여러분 자신의 아호를 멋지게 지어보세요.
이름을 짓는 과정과 똑같이 진행하시면 됩니다.
호는 이름자를 대신하는 것이므로 성은 원래 성을 쓰면 되고, 이름짓듯이 아호를 정하시면 됩니다.


아래는 아호와 예명에 대한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에 나온 해설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국어사전 해설 - 출처:두산동아 국어사전

예ː명(藝名)[명사]
 연예계에서,연예인이 본명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아ː호(雅號)[명사]
 (문인·화가·학자 등이) 본이름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준말)호(號)
ː(號)[명사]
 <아호(雅號)>의 준말. 별호(別號).


▒ 백과사전 해설 - 출처:두산세계대백과

(號)

본 이름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호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 ·사대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 이름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호는 집안에서 사용한다는 의미의 당호(堂號)와 시 ·서 ·화 등에 쓰는 아호(雅號)로 나누어지기도 했으나, 양자간에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 ·술 ·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 ·화담문인 ·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하였다.

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 ·서 ·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선객(仙客) ·불노(佛奴) ·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 ·불 ·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 이래로 호 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호보(號譜)'들의 편찬은 호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1945년에 편찬된 《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당(堂) ·암(巖) ·실(室) 등으로 끝나는 호가 많았다.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체제가 다원화되면서 2종 이상을 쓰는 호보다는 자신의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 ·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호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